태인박씨(泰仁朴氏)에서 밀성박씨(密城朴氏)로 복관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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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3-21 10:28 조회35회 댓글0건본문
○ 잘 아시다시피 조선초기 1455년경 돈재(遯齋)공 박연생(朴衍生) 어르신께서 본관을 밀성박씨에서 태인박씨로 개관한 이후에 다시 태인에서 밀성으로 복관한 시기가 예조의 해조제음과 홍직필 답문으로 신묘년(1831년) 족보를 발행한 시기라고 많은 후손들이 알고 있지만 복관을 하게 된 시기가 훨씬 이전(1750년대 전후)이라는 정확한 사실을 알고 사용하는 것이 후손으로서 도리라고 판단되어 글을 올립니다.
○ 첫째 우리 백우당공파 문중 후손 중 과거시험(사마시-생원,진사)에 합격한 박봉장(朴鳳章)과 박의순(朴懿淳) 두 분이 국가에서 주관하는 과거시험(1773년 및 1803년)에 밀성박씨를 사용한 사실입니다.
∙ 1773년 계사방목 증광시 합격자 명부에 박봉장(朴鳳章)은 나이 42세에 본관은 밀성박씨로 장성에 거주하며 부친은 박 진(朴 珍 - 필자의 8대조임)으로 기록되어 있음.(계사합6경대증광사마방목 참조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1803년 사마방목 증광시 합격자 명부에 박의순(朴懿淳)은 자(字)는 중회요 신사년(1761년)생으로 본관은 밀성박씨이며 장성에 거주하고 부친은 박봉채(朴鳳采)로 기록됨(숭정3계해춘대전중궁정진후평복합2경경과별시증광사마방목 참조)
○ 둘째 황윤석 선생이 을사년(1785년) 5월에 지은 주부 박공전에서는
“돈재공께서 본관을 밀성에서 태산(泰山)으로 명명한 이후 약 300여년의 세월이 흘러 자손들이 여러 종친들과 함께 족보를 수보하면서 옛날 본관인 밀성박씨를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라는 글을 보면 1455년에서 300여년이 지난 1750년대 전후에 본관을 밀성박씨로 다시 사용하기로 논의하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입니다.
○ 또한 최근 몇 년전에 장성군 용곡리 소재 백우당공(朴尙義) 어르신 선영을 정비하면서 백우당공의 부친이신 어모장군 박사순(朴士珣)공과 백우당공 묘역에서 묘지석 2점이 발굴되었는데 그중 한 점에은 밀성박사순 묘지석(密城朴士珣 墓誌石)이라고 명확히 표기(종친회 사무실 보관중)되어 있었고 지석 끝부분에 숭정3갑진7월(즉 1784년)에 6대손 박동익(朴東益, 매헌공의 현손임)이 글을 썼다라고 표기되어 있어 1784년에 복관한 밀성박씨로 묘지석을 만들었음이 명백하다 할 것입니다.
○ 하지만 이후에도 상당기간 밀성과 태인이 혼용되다가 현대를 살아가는 돈재공 후손들중에는 상당수가 밀성(밀양)박씨를 사용하고 있고 일부는 태인박씨를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한 뿌리의 후손이므로 어느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고 논란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 가문의 역사를 바로 알고 상황에 따라 병용하는 것도 바람직 하지 않을까 봄이 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봅니다. 감사합니다.
밀성박씨(태인박씨) 돈재공 19세 백우당공 13세 후손 박성구(朴成求)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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