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국공신 절충장군 백우당공(栢友堂公) 휘 상의(尙義)의 묘장성군 장성읍 용곡리 山 34-1
主簿栢友堂朴公尙義傳
朴公尙義字宜甫自新羅儒理王尼師今有八子爲昔氏脫解所忌托分封出外而其長得密城爲別子立宗之祖冠裳횅奕與東京相終始至高麗亦然益齋牧隱二李氏實是稱焉其季有贊成事文靖公說生縣丞昌密而其子居仁不仕譜云謫宦仁義縣因居者蓋謂此也居仁少子承奉當我 太祖革命及其兄問奉偕廢擧不仕욜慨讀經書慕西山栗里之風自有傳子德明以 太宗壬午爲虎翼副司正中武乙科從三品始移長城縣世居而葬一子衍生有智勇節義事 端宗以忠武大護軍在京被 世祖潛邸知遇甚厚而不樂爲用作書訣妾矢必不復仕遂遯于潭陽府月山下女壻家雖累有徵命遙錄佐翼從勳而終托疾不起以卒葬因其遯而不于先兆貫以泰山而不于舊貫所以自悼而自別也亦有傳後三百餘年而子孫與諸宗修譜復舊貫云自是歷大護軍文雅宣될將軍賢孫及宗元而有慶基殿參奉守溫議政府右參贊守良四昆季復昌其家守良卽 中 仁 明三朝名臣也有河西金文正先生誌銘稱其遺命勿請諡立碑豈以乙巳以後微意歟守溫第三子士珣御侮將軍娶延日吳世諶女生公于嘉靖戊戌七月四日公幼遊街上有人見而異之曰他日名天下必此子也旣就珍原縣生員朴公元恂學聰明絶倫日誦三百餘行同門如邊望菴以中諸公莫不服尋不欲以章句腐儒自居駸駸古今象數百家者流日用力不懈竟得其妙有言無不中人己目以邵子尤廉介自厲不顧家人産業與弟奉事尙智友愛淳篤無一毫物我其析箸日擇田肥僕壯者手券歸之弟執手止之曰父母所遺理宜得平彼饒而實奚爲於我人之駥惑姑忘論我心其得安乎公乃曰吾年逾四十連擧七女而無一子將不免女孫香火爾纔三十必有子有孫傳以先業可矣忍作女孫所有耶因幷他餘器用悉以卑之無一留者弟不敢終辭亦恒以不安及公子允鑑生而長成則弟以水田最沃者五斗地還之曰此吾志也若公之爲視古薛包錄朱子小學者不其班乎卽其弟亦加人一等矣世猶有就蘇瓊相訟而不以價抑何理哉公旣內行之備而仰觀俯察之理老而益精盖星氣大經要不出周禮漢晉志占候之範圍而所用葬法亦克藏往而知來豈又兼以唐典三式之相參而爲本朝鄭虛菴希良南格菴師古前後之方駕歟方萬曆中那運文明實廩廩太平矣而栗谷李文成先生重峯趙文烈先生己皆相講于土亭李文康之맛龜峯宋持平翼弼師友之間以丁丑長星期在十五年者爲國事先憂而公亦前言必有靑衣賊入自國城東門若南小門時李月沙廷龜自丁亥隨父長城本縣衛中己獨先識公相密而公不甚知名人往往莫之遽信不數歲而壬辰四月倭賊果大至 宣祖西幸漢城開城平壤相續以陷而八路惟全羅粗安癸巳天將李如松東援雖될致收復仇싶而賊據嶺海猶狺狺可虞甲午正月有薦者用祖宗盛際特敎選名儒直授六品之典擢公奉訓郞行觀象監兼敎授轉奉直郞盖月沙所公誦也丁酉天將麻貴董一元劉綎陳璘水陸再擧邢玠至漢城摠督四軍而御史楊鎬奉經理軍務衣食之命將轉赴慶尙單車至平壤月沙沿檄往對所問狀楊公旣入漢城語接伴使李漢蔭德馨曰僚知貴國有前言靑衣賊入城者可得見乎李公曰我國無此人也楊公牢請不己且曰僚發北京陛辭之日仰占天象知此人當在貴國可相欺耶李公以聞 宣祖亟命深致出見公方在都下纔躋門楊公爲延上座語移日大悅曰子果是祖地狐山之精必名天下因留處行府待以軍師不須臾許離凡征伐機宜之秘無不諮決是冬師期行且發有鳶盤翔于上楊公曰此何祥也公曰今行必無利亦必無敗楊公曰無利必敗寧詎無敗公曰師行將以殺伐鳶亦飛而食肉者殺伐食肉其勢等故也旣至蔚山郡擊賊果破外寨而圍內城竟不克乃退公言之驗大率類此於是華東競大噪以爲神甚至兒童走卒亦莫不傳誦戊戌七月陞通德郞行司宰監主簿庚子十一月陞朝奉大夫行典獄暑主簿辛丑三月陞通訓大夫還司宰主簿俄以軍職寄祿移宣畧將軍行忠佐衛司正七月義興衛司正戊申光海嗣位丙辰四月禦侮將軍行龍驤衛副護軍丁巳六月加折衝將軍得排玉因行本衛副護軍盖公初志非屑屑一官而特以月沙三十年虛館知己也楊公又越萬里傾盖托契也似不得不爲之屈者而辛丑以後迤至光海之世則時事轉非人亦莫我好也浮沉軍祿庸非其益所不樂哉故公踪跡多散于湖海梓楸之間及以天啓辛酉六月六日卒享年八十四妻河東鄭氏郡守和曾孫判中樞佐翼功臣河源君文節公守忠玄孫也一子卽尹鑑宣務郞軍資監參奉丁酉七月倭賊再至陷閑山島八月陷南原府九月逼畿南至稷山縣 沙坪爲麻貴標下解生所大敗南走淸正一枝向常州坪行長一枝實刳全羅十七日逾蘆嶺至本縣所過血道而鄭氏以十九日被害允鑑年十八未娶被릍歷光州昌平縣至綾城縣誑賊萬端每樵採及期示信無疑乃脫逃旣五日不食林蔓烏食子三四伽目始視猶畵伏夜行十月四日得歸鄕則寄氏娣先幸免收母屍以殯而得而葬之公時繫官未歸能蒼荒中禮事公亦孝聞崇禎丙子十二月淸虜東搶本府使柳時定以守城將將領兵入笠巖屬允鑑留鎭試定妻金氏府使尙寬女也仙源文忠公尙容淸陰文正公尙憲從女也于允鑑母家姨親三從也以故素爲時定所倚仗相驩至是轉米自邑倉輸于城倉則力勸時定聽從軍者婦子不在輸中一軍感悅方佰北援猝夜驚逃府軍亦潰再徵次蘆嶺不肯行時定欲斬其魁允鑑止之亟馳往衆皆羅拜曰留鎭大人來耶允鑑論以大義且曰爾若逗흡奈官家必先殺我何衆乃齊謝曰妻兒旣被顧恤何敢忘惠乃不督而行時定歎曰兵不可以威可以德吾其得人哉旋聞虜遊騎南過礪山郡不一二日且犯本府欲先散官儲因以避去則又不可曰私計則然動一境民心可乎虜竟幸不至時定又稱其得體始公在世京外大小名家葬親者得公一指點乃謂以孝公亦自信旣爲妻因袝府北龍門洞親墓下規其側埋灰識之擬與同兆旋不滿改求他山卒莫得晩歲乃歎曰天也然亦足保我子孫哉果如其言後公卒六十六年 肅宗丁卯孫梅軒處士行重碣文樹石則松巖奇先生挺翼素重公又重梅軒之以道義交也特筆以詔百世而終以公所稱天之一字拳拳焉銘之昔程叔子謂數學至邵于方及理夫邵子尙矣理也天也無古今一也公亦知幾乎知天哉越松外史黃胤錫曰昔我五代祖考値光海좔倫年三十左右不赴擧遯于興德本縣玉輪山北保安里祖墓之側遇公卜居屋未就而其地失余八九歲讀手筆日記有萬曆四十三年乙卯以下三百九十字皆公語也今在篋可徵於是始知東國有主簿朴公稍長閱李文靖植澤堂集啓山志知公與皇明杭州人杜忠亦名思忠而東來者齊名中歲得柳夢寅於于野談知公八숄寓潭陽畜侍兒其遊走輒跟致如神曰爾所之上必有白氣旣又三十年南北遊接耆老士大夫博古非忘語者非一聞所未聞益知公之爲藝實曠世一人而玆獲奇先生所採家狀及一世公評而書諸石者則反茫然童觀之愧爲之彌日月未己徐乃覆而按之其少日聰明之空刊而不拘拘章句者此何等志氣也晩景友愛之孚人而不逐逐財産者是何等姿質也受知楊公能坐決勝敗累試而愈驗則雖謂之密贊天朝再 藩邦之烈宜未爲夽也思改壽藏將偈幹造化方耋而卻悔則雖謂之眞悟天理莫容人力之境宜未爲過也夫精義入神大而化之聖學之極功而聖于藝者亦然由藝造極何往而不天且如文人之文不抑藝之一乎而世之因文而悟道者不甚鮮也道之所悟卽天所在譬之佛氏所喩捨筏登岸寧詎不然然則公之於藝亦殆聖矣奇先生于公里纔後公大年而原公所傳之祖直以張子房赤霆經與其裔洞玄子微玉髓經大爲朱子蔡氏所稱道發揮者言之至曰公於此有符使朱蔡見之其必莞爾也審矣是用朱子自言太極通書二解必致周子莞爾者而引而爲公重爾朱子後孔子也體全用大非一藝可名而山陵議狀亦千古至論或者以其有謂宜廣求草澤意在欲官蔡氏此未可知然蔡氏其老友而高年也亦上承牧堂而下啓九峯者也非傑然大儒而然乎哉盖天文地理易範律曆武侯之八陣邵子之經世無不就正朱子而玉髓發揮又其一焉奇先生正學챵通亦在乎玆故爲能的知公傳之所自語曰惟佛與佛始能相知余然後知公之聖于藝者尤信然古之所貴乎藝者無他必其本之以德與行乃其藝可貴而沿而溯之天加幾其亦知也否者卽幸而名一方也有之如水無源如木無根雖家庭州閭不足有孚而況於上國之撤乎而況於天象之動乎而況乎畢竟知天之際乎今公友愛旣盡乎同氣而繼而賢子孫承家法未艾則其當日盡孝者可知卽一藝雖聖亦餘事遊戱之發耳初不當爲公之重故風聲自徹於上國光景自動於天象而一言歸天尤洞然可敬於遲暮嗚呼天之一言古聖賢千言萬語有不以爲歸者乎是則讀書而求道者固自知之以公言之豈特公一事之所關哉觀夫曆昌之交有康津縣潛夫李懿信者謂漢城運盡宜遷都交河縣一疏倡發擧國騷動有扶安縣武人金馹龍者謂元宗塞門洞本邸有王氣宜奪地建宮闕壓之慶德之役民力竭有務安縣摠持寺僧性智者謂 儲慶仁嬪順康園在豊壤古縣應出王者上下猜疑添禍懿親是皆全羅之産亦公所比壤而識面也킬公之藝不與彼有間而公乃獨偈於斯何也要之彼之窩主大則膽奮쇨筠小則造쏸纘違而三南在在又是仁弘之客爾其日夜唆嗾鷹犬是甘才非無可逞術非不幸中而大都迷君廢 母滅臨海永昌綾昌之類故天之降監致癸亥戮死懿信亦無一塊肉不可謂幸宦也公則不然所深契月沙也所相從澤堂一隊也雖兵間筮仕人曰妙選而自以故家子弟寧偃蹇傲兀不冒昧僥倖晩更超然遠擧自汚自晦而軍祿有無有不以爲意則亦無惑乎獨偈不然公之名天下衆所知也一不偈安知姦凶之鋒不轉急於 仁祖乎然則癸亥靖社之義公亦實是陰翊而向也知天之說其爲通國家大運而包之也又不翅明甚夫如是彼씽씽뺌뺌妄目公徒藝者其尤淺之爲丈夫也抑有一說可粲聊試究之我 成宗 中宗遠踵宋沈括元許衡故事近遵欽敬閣簡儀臺成法自天文地理律呂卜筮醫藥諸學敎授習讀各令極選者外別置兼敎授敎官而著之大典之前後續錄大率出於虛白成文載公俔慕齋金文敬公安國前後諸賢建白而其膺是選者又孰非名門名儒如柳城隱桂隣爲天文習讀則眉巖文節公希春父也寒暄金文敬宏弼門人也鄭華爲天文敎官則戶曹參議復始父也直提學賜玄孫也趙養心晟爲監修儀象監校律呂兼醫籌律三學敎授則龍門昱兄也退溪李子友也李玉山瑀爲觀象監敎官則栗谷李子弟也柳랜爲天文敎授則謙菴雲龍子也西厓文忠公成龍從子也而鄭北窓훼亦爲觀象監敎授是皆於公或先輩或곡世俱選也而別兼者尤選也故至 肅宗又命勿論生員進士幼學擬差天文敎授典錄通考續大典可考也旋復곡文武官擬差而猶以兼敎授爲重以余耳目所及則其時全羅有鄭都事得天光州也崔察訪天壁古阜人也皆故家聞人也頃余奉敎于쏩쏩金參判文用謙則亦曰兼敎授如中世掌樂院兼主簿此列聖盛事也吾壯義洞中鄭謙齋机如世族通周易中庸餘力丹靑少曰亦差敎授訓本業人有效後遷義禁府都事歷河陽縣監江華府經歷惜今人徒識其爲畵院中人耳又曰自 英祖中年始令本業人受差遂成常調則今不可復古重可惜也嗚呼 英祖以前若公所初仕者其爲選何如哉 祖典昭載耆德確據而一種諛聞乃以今疑古斯則曷足云云惟世之민史筆者未必皆三長也余是懼焉又悲公言行出處之爲藝掩也不得己幷以爲諗
崇禎三年乙巳五月 日 前行世孫翊贊 黃胤錫 撰
주부 백우당 박공 상의전
공(公)의 이름은 상의(尙義)요 자(字)는 의보(宜甫)이며 근본은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장자(長子)인 밀성대군(密城大君)이고 이후 신라와 고려에 걸쳐 많은 벼슬을 배출하였으니 고려조 때 열(說)이라는 분은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이고 시호(諡號)가 문정(文靖)이며 이분이 현승(縣丞) 벼슬을 지낸 창밀(昌密)을 낳았고 그 아들 거인(居仁)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족보에 이르기를 거인(居仁)은 인의현에 귀양살이 한 것이 인연(因緣)이 되어 그곳에서 정착(定着)하였다고 한다.거인(居仁)의 작은 아들 승봉(承奉)은 우리 태조대왕이 혁명을 일으킬 당시 그 형 문봉(文奉)과 함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글을 읽으며 옛날 백이숙제의 얼을 사모(思慕)하였다.그 아들 덕명(德明)은 태종임금 임오(1402)년에 무을과(武乙科)에 합격하여 종삼품(從三品)인 호익부사정(虎翼副司正)이 되었는데 이 분께서 처음으로 장성고을에 이거(移居)하여 대대로 거주하게 되었다.그분의 외아들 연생(衍生)은 지혜(智慧)와 용력(勇力)과 절의(節義)가 대단한 분으로 충무시위사대호군(忠武侍衛司大護軍)이라는 벼슬로 단종임금을 섬겼다.
세조(世祖)의 대군(大君)시절에 서로 교분이 두터웠지만 세조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싫어 애첩과 영원히 이별한다는 글을 남기며 낙향(落鄕)하여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담양고을 추월산 아래 사위집에서 은둔생활을 하시고 수차 출사(出仕)하라는 어명(御命)과 함께 좌익원종훈장까지 내렸으나 끝내 신병(身病)을 빙자하여 나아가지 않고 돌아가셨다.본관(本貫)을 태산(泰山)으로 쓰고 옛날 본관인 밀성(密城)을 쓰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행적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3백년 만에 자손들이 모든 종친(宗親)들과 더불어 족보(族譜)를 손질하면서 옛 본관인 밀성(密城)을 다시 사용하였다.이때부터 대호군(大護軍)이신 문아(文雅)와 선략장군(宣略將軍)이신 현손(玄孫)이 탄생하셨고 종원(宗元)이라는 분은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신 수온(守溫)과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신 수량(守良)등 4형제를 두어 그 집안이 다시 창성(昌盛)했다.수량(守良)이라는 분은 곧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을 섬긴 삼조명신(三朝名臣)인데 하서(河西) 김문정(金文正) 선생께서 지은 묘지명에서“그는 시호(諡號)도 청하지 말 것이요 묘비(墓碑)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遺言)을 남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이 말씀 속에 을사사화(乙巳士禍) 뒤에 속으로 느낀 미묘한 뜻이 숨어 있을 것이다.수온(守溫)이라는 분의 셋째 아들 사순(士珣)의 벼슬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인데 연일(延日) 오세심(吳世諶)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백우당)을 가정 무술(1538)년 7월 4일에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보룡산 기슭 하남에서 낳았다.공이 어려서 거리에서 놀 때에 한 사람이 공의 용모(容貌)와 행동이 특이(特異)한 것을 보고 뒷날 반드시 천하(天下)에 이름을 내리라 하더니 그 뒤에 공은 진원고을 생원 박원순(朴元恂)이라는 분의 문하(門下)에서 공부를 할 때 총기(聰氣)와 재기(才氣)가 다른 사람과 달라 날마다 삼백여 줄의 글을 외움에 동문생을 망암 변이중(望菴邊以中)을 비롯한 여러 학우들이 그를 부러워하더라.
공은 글이나 짓고 외우는 선비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독학(獨學)으로 고금상수(古今象數)라는 책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니 사람들이 소강절(邵康節) 선생이라 하였으며 더욱이 청렴(淸廉)한 지조(志操)로 가산(家産)에 욕심이 없어 동생인 참봉(參奉) 벼슬을 한 상지(尙智)가 분가(分家)하는 날에 좋은 논밭과 건장한 종들은 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박토(薄土)와 노복(老僕)만을 갖자 동생이 공의 손을 잡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좋은 전답(田畓)과 종을 저만 갖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저를 욕할 것인즉 거두어주십시오 하자 공은 내 나이 사십이 넘도록 딸만 있고 후사(後嗣)를 이을 아들 하나 없으니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해야겠지만 동생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인데 아들도 있고 손자(孫子)도 있으려니 선조(先祖)의 재산을 동생에게 전하는 것이 외손봉사 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자 동생이 감히 사양치 못하고 받았으나 동생 상지(尙智)는 이를 항상 마음에 걸려하다가 공(公)이 늦게 아들 윤감(允鑑)을 얻어 장성하자 옥토(沃土) 오두락(五斗落)을 반환(返還)하면서 이것이 나의 뜻이라 하니 공의 형제간에 일을 보면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에 나오는 설포(薛包)와 비슷하니 동생 역시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지금 세상에서 볼 때 송나라의 소경과 같이 부모가 물려주신 전답(田畓)을 놓고 형제간에 송사(訟事)하고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 것과는 크게 비교가 되지 않는가?
말년에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대한 공의 학문이 경지(境地)에 올라 공께서 지으신 성기대경(星氣大經)은 주례한진지(周禮漢晉志)와 같이 기후(氣候)를 점치는 책과 같다.
공께서 행하신 장례법(葬禮法)은 옛날을 미루어 내세(來世)를 예측(豫測)하는데 또 당전삼식(唐典三式)을 참고 했으며 우리나라 허암 정희량(虛菴 鄭希良) 과 격암 남사고(格菴 南師古)의 공부를 터득하였다.그때 국운(國運)과 문물(文物)이 태평성대(太平聖代)라 볼 수 있었지만 율곡 이문성(栗谷 李文成) 선생과 중봉 조문열(重峯 趙文烈),토정 이지함(土亭 李之맛),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과는 사우(師友)사이로 이들이 서로 하늘의 별을 보고 15년 후에 국난(國難)이 있을 것을 예견하였으며 공(公)도 예언하기를 반드시 파란 옷을 입은 적(賊)이 서울 동문과 남문으로 들어오리라 하셨다.그때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선생이 정해년에 부친을 따라 장성고을에 왔을 때 먼저 공을 알아보고 서로 가까이 지냈다.얼마 후 임진년 4월에 왜적이 쳐들어와 선조(宣祖)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蒙塵)하신 후 한성(漢城)과 개성(開城),평양(平壤)성까지 함락되면서 팔로(八路) 중 오직 전라도만이 온전한 한 상황에서 명장 이여송(明將 李如松)이 구원병(救援兵)을 거느리고 와서 대강(大綱)을 수복(收復)하고 돌아가니 그때도 왜적들이 아직 산과 바다를 차지하고 있었다.갑오년 정월에 월사 이정구 선생이 공을 조정에 천거하여 봉훈랑 행관상감 겸 교수(奉訓郞 行觀象監兼敎授)와 봉직랑 벼슬에 오르셨다.
정유년에 왜군이 재침(再侵)하자 명장(明將) 마귀(麻貴),동일원(董一元),유정(劉綎),진린(陣璘) 등과 같이 온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접반사(接伴使)로 온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에게 말하기를“그대는 귀국(貴國)에 푸른 옷을 적(賊)이 경성(京城)의 동문과 남문으로 들어오리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는데 만나 보았는가?”라고 물으니 이 공이 말하기를“우리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하니 양 공이 재삼 묻고 말하기를“북경(北京)을 출발하는 날에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귀국(貴國)에 그러한 사람이 있는 줄을 알고 있는데 어찌 속이려하는고?”하니 이 공이 선조임금께 아뢰어 그런 사람을 찾아오라 명령하시니 그때 공은 한성 아래 자척문에 계셨다.
양(楊) 공이 공을 만나자 상좌(上座)로 맞이하고 날이 저물도록 담소(談笑)하더니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그대는 과연 호산정기(狐山精氣)로 태어났도다.”하고 반드시 천하에 이름을 날리리라하면서 군부(軍府)에 있으시라하고 군사(軍師)로서 예우(禮遇)하며 전장의 모든 일을 공에게 물어 결정하더니 그 해 겨울 군대가 출진하려할 때 솔개가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오르니 양공이 말하기를“이게 무슨 징조인가”하니 공이 대답하기를“이번 출진은 반드시 이익도 없고 또한 손해도 없으리라”하니 양 공이 말하기를“이익이 없으면 반드시 패할 것인즉 어찌 손해가 없다하는가?”하자 공이 말하기를“출진함은 살벌(殺伐)을 목적함이요 솔개가 날아감은 식육(食肉)을 목적함이니 살벌(殺伐)과 식육(食肉)이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날 울산군에 이르러 왜적(倭賊)을 쳐 과연 왜세(倭勢)는 격파했으나 적(賊)이 내성(內城)을 굳게 지켜 성(城)을 함락(陷落)하지 못하고 퇴각(退却)하게 되여 공의 말씀이 정확히 맞고 보니 온 나라에 공이 신(神)이라고 소문이 나서 어린이들에게까지도 펴졌으며 무술년 7월에 통덕랑 행사재감 주부(通德郞 行司宰監 主簿),경자년 11월에 조봉대부 전옥서 주부(朝奉大夫 典獄署 主簿),신축년 3월에 통훈대부 사재감 주부(通訓大夫 司宰監 主簿)에서 잠시 군직(軍職)으로 옮겨 선략장군(宣略將軍) 행충좌위사정,7월 의훙위사정,무신년에 광해가 임금이 된 후 병진 4월에 어모장군 행용양위부호군(禦侮將軍 行龍꼈衛副護軍),정사년 6월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옥관자를 받으셨으니 공은 평소 벼슬에 욕심이 없었으나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선생과의 품계(品階)를 떠난 30년 지기(知己)와 만리타국에 와서 서로 믿고 다정하게 지내 준 양공 때문에 벼슬을 하신 것이다.신축년부터 광해(光海)의 세상이 되어 정사(政事)가 날로 그릇됨에 벼슬을 버리고 자연강산으로 종적(蹤迹)을 감추신 후 천계 신유년 6월 6일에 세상을 떠나셨다.처(妻)는 하동정씨 군수(郡守) 화(和)의 증손(曾孫)이요 판중추좌익공신 하원군 문절공(文節公) 수충(守忠)의 현손녀(玄孫女)로서 아들 삼형제를 낳으셨으니 윤감(允鑑)은 선무랑 군자감 참봉(軍資監 參奉)을 하셨는데 정유년에 왜적이 재침(再侵)하여 한산도(閑山島)를 함락하고,8월에 남원부(南原府)를 함락한 후 9월에 기남(畿南)을 핍박할 때 직산현 소사평에 이르러 마귀(麻貴) 부하인 해생(解生)에게 크게 패(敗)하여 남(南)으로 퇴각(退却)할 때 퇴로(退路)를 청정(淸正)의 부대는 상주(尙州)로 향하고 행장(行長)의 부대는 전라도(全羅道)로 향해 17일에 노령(蘆嶺)을 넘어 장성(長城)에 도착하였는데 왜적이 지나간 길마다 핏빛으로 물들었다.
공의 처 정 씨가 19일에 왜적(倭賊)에게 살해당했는데 그때 윤감(允鑑)의 나이 18세요 윤립(允立)은 15세,윤건(允建)은 12세인데 윤감(允鑑)이 미혼 총각으로 왜군의 포로(捕虜)가 되어 광주,창평 땅을 지나 능주 땅에 이를 때까지 날이면 날마다 나무하고 나물케는 일로 신임(信任)을 얻은 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주(脫走)를 결행하여 굶주림을 참으면서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니 기(奇)씨 가문으로 출가한 누이가 어머니의 시신(屍身)를 초빈(草殯)하였는데 그때 공께서는 관직(官職)에 있어 집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아들인 윤감이 창황(蒼黃)한 난리 속에 장례(葬禮)를 마쳤으니 윤감(允鑑)도 또한 효자란 소문이 있었다.
숭정 병자(1636)년 12월에 청나라 오랑캐가 우리 동방을 침범할 당시 장성부사(長城府使) 유시정(柳時定)이 수성장으로 장차 병사를 거느리고 입암산성(立巖山城)으로 들어가며 윤감(允鑑)에게 통솔권을 위촉(委囑)했다.유시정(柳時定)의 처(妻) 김 씨는 부사(府使)인 상관(尙寬)의 딸이며 선원 문충공(仙源 文忠公)과 청음 문정공(淸陰 文正公)이신 상헌(尙憲)의 질녀요 윤감(允鑑)의 어머니와는 이친삼종(姨親三從)인 관계로 유시정(柳時定)과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다.전투가 임박하자 군량미(軍糧米)를 읍창(邑倉)에서 산성남창(山城南倉)으로 수송하려 하자 윤감이 시정에게 건의하여 군사들의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온 군사가 모두 감복하였다.전라감사의 구원병이 밤에 놀라 도망갔다는 소문에 장성부 군사도 흩어지기 시작하여 노령(蘆嶺)에서 병사들을 소집하는데 따라주지 않자 시정(時定)이 그 주동자의 목을 베고자 하니 윤감(允鑑)이 만류하고 말을 달려 그들에게 다가가니 그들이 도열하여 절을 하며 말하기를“유진대인(留鎭大人)께서 오셨습니까?”하였다.윤감(允鑑)은 대의(大義)를 들어 설득하여 말씀하시기를“만일 너희들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으면 관가(官家)에서 반드시 나에게 먼저 책임을 물을 것이니 어찌 할 것인가?”하자 군중이 일제히 사죄(謝罪)하며 하는 말이“우리 처자(妻子)들이 이미 대인(大人)의 은혜(恩惠)를 입었는데 어찌 그 은혜를 잊으리요.”하고 특별한 감독 없이도 행군(行軍)을 시작하자 시정(時定)이 감탄하여 하는 말이“병사란 위협만으로는 통솔할 수 없고 덕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제대로 통솔할 수 있구나”하더라.이때 갑자기 오랑캐들이 호남을 향해 말을 달려 여산을 통과했으니 2,3일 내에 본부(本府)에 도달하리라는 급보(急報)를 듣고 시정(時定)이 먼저 관곡(官穀)을 풀어 군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피난을 가도록 하려고 할 때 윤감(允鑑)이 또한 불가하다고 말씀하시기를 사사로운 계획으로는 고려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되면 온 국민의 민심(民心)이 흉흉해 질 것이니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했다.다행히도 오랑캐가 오지 않자 시정(時定)이 또 다시 윤감(允鑑)의 대체적인 생각을 칭찬했다.
공께서 생존 시 경외대소명가를 막론하고 공에게 한 지점(指點‥명당을 말함)을 얻어 어버이를 장사(葬事)하는 것만이 효도(孝道)가 된다고 온 세상 사람들이 말하였고 공(公)께서도 자신의 공부를 믿었으며 이미 처(妻)를 위하여 장성부 북쪽 용문동 어버이 묘(墓) 아래 장사하였다가 바로 타산(他山)으로 이장(移葬)하려 하였으나 끝내 하지 못하고 만년(晩年)에 탄식하시기를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시고 그러나 이 자리도 내 자손은 보호할 수 있는 곳이라 하시더니 과연 그 말씀과 같이 되었다.
공(公)이 돌아가신 후 66년 숙종 정묘에 손자(孫子)인 매헌처사(梅軒處士) 행중(行重)이 비석(碑石)을 세울 적에 송암(松巖) 기(奇) 선생이 본래 도의(道義)로서 지내는 사이라 특별히 붓을 들어 백세 후라도 공을 알게 하였다.옛날 정숙자(程叔子)는 운명(運命)을 수학(數學)이라 하시고 소자(邵子)는 이치(理致)라 말하시고 공은 하늘이라 말씀하셨으니 공은 거의 하늘의 이치(理致)를 터득하셨다 하겠구나.
월송외사(越松外史) 황윤석(黃胤錫)이 이르기를 옛날 우리 5대조께서 광해(光海)의 혼정시대를 만나 나이가 30전후가 될 때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시고 흥덕고을 옥윤산 북쪽 보안리 할아버지 묘 곁에 은거(隱居)하셨는데 선생이 점지(點指)하여 주신 집터에 집을 짓지 못하였으므로 그 터를 잃어버렸다.내 나이 89세 때 수필일기를 읽어보니 만력 43년 을묘(1615)년 이하 390자(字)는 모두 선생의 말씀인데 오늘날 서류함에 보존되어 내놓을 수는 없으나 비로소 우리나라에 주부(主簿) 박 선생이 있음을 알았다.조금 자라서 문정(文靖) 이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에 계산지(啓山志)를 열람하여 보니 선생이 명나라 항주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온 두충(杜忠‥一名 사충(思忠))과 더불어 명망(名望)이 있었음을 알았으며 중간에 유몽인(柳夢寅)이 쓴 야담지(野談誌)를 읽고 선생께서 80세에 담양에 사실 때 시중드는 아이가 있었는데 귀신같이 따라 오면서 이르기를 선생께서 가시는 곳에는 반드시 흰 기운이 떠 있다고 하였음을 알았다.또한 30년간 남북을 유람(遊覽)하면서 지식이 해박(該博)한 사대부(士大夫)들과의 접촉이 많아지면서 미처 듣지 못한 바를 들을 수 있어 더욱 선생의 재주가 실로 세상에서 제일임을 알았다.
이에 기(奇) 선생께서 쓴 가장(家狀) 및 당시 공에 대한 평(評)으로 비에 새긴 것을 읽어 보다가 부끄러워 눈앞이 캄캄하다가 정신 차려 두세 번 살펴보니 선생은 젊었을 때 총명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났고 장구(章句)에 얽매이지 아니 하였으니 이는 무슨 지기(志氣)이며 늙어서 우애(友愛)로 사람을 믿게 하고 금전에 연연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무슨 자질(資質)인고.양호(楊鎬)에게 신임 받아 능히 앉아서 승패(勝敗)를 예단(豫斷)한 바 여러 차례 적중(敵中)하였으니 이는 중국을 가까이서 돕고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키는데 공훈이 있었다고 한들 지나친 평론은 아닐 것이다.선생이 수장(壽藏‥생전에 미리 마련한 묘자리)를 바꾸려고 하시다가 80세가 되어서야 인력으로는 용납하지 못할 천리(天理)를 깨닫고 뉘우치는 경지까지 이르셨다.
무릇 정의(精義)로 신통(神通)하여 크게 변화한 것은 성학(聖學)의 극공(極功)인데 지리(地理)를 통한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지리(地理)로 말미암아 극(極)에 나아가면 어디 간들 천리(天理)가 아니랴? 또한 문인(文人)의 문(文)도 예(藝)와 같으니 세상에 문(文)으로 인하여 도(道)를 깨달은 자가 심히 적지 아니 한데 도(道)를 깨달은 바는 하늘에 있는 것이다.비유하건데 불(佛)씨가 이른바 사다리를 버리고 언덕을 오를 수가 있으랴? 했으니 그러므로 예(藝)에 통하였다고 하였다.기(奇)선생은 선생과 겨우 60년 후배인데 공의 전한 바를 근본으로 삼아 곧 장자방(張子房)의 적정경(赤霆經)과 동현자미(洞玄子微)의 옥수경(玉髓經)을 주자(朱子)와 채(蔡)씨가 크게 칭찬한 사실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선생의 학식이 이와 같으니 주자(朱子)와 채(蔡)씨가 선생을 만나 보셨다면 반드시 조용히 웃으셨을 것이다.이는 주자(朱子)께서 스스로 태극통서이해(太極通書二解)를 말하면서 반드시 주자가 조용히 웃었을 것이라는 말을 인용(引用)하여 선생의 학식을 신중히 논평한 것이다.
주자(朱子)께서는 공자(孔子)의 후인(後人)으로 체(體)와 용(用)이 온전하여 일예(一藝)로 이름할 수 없으며 산능의장(山陵議狀)은 또한 천고(千古)의 지론(至論)인데 혹자는 이르기를 초야(草野)에서 인재(人材)를 구하면서 채(蔡)씨를 벼슬 시키고자하는 뜻이 있었다고 하나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채(蔡)씨는 노우(老友)로서 나이도 많고 또한 위로는 목당(牧堂)을 잇고 아래로는 구봉(九峯)을 깨우쳐 주었으니 걸출한 대유(大儒)가 아니면 그렇게 하였으랴? 대개 천문지리(天文地理)와 역범율력(易範律力)과 무후(武候)의 팔진(八陣)과 소자(邵子)의 경세(經世)에 대해서도 주자(朱子)께서 두루 연구하셨는데 옥수경(玉髓經)을 발휘하신 것도 그 하나이고 기(奇)선생도 정학(正學)에 능통함에도 선생의 학문 또한 유래가 있음을 알고 말하기를 불(佛)은 불(佛)이라야 비로소 서로를 안다고 하였으니 내가 이 말을 들은 연후에야 선생이 예(藝)에 통하였음을 더욱 믿게 되었다.그러나 옛적에는 예(藝)를 귀히 여김은 다름이 아니라 예(藝)가 반드시 덕(德)과 행(行)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그러므로 예(藝)를 귀히 여겨 거슬러 찾아 가면 하늘도 가히 알겠지만 그렇지 아니 하면 요행히 일방(一方)에만 이름이 알려져 근원(根源) 없는 물이나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이 가정(家庭)이나 향리(鄕里)에서 조차 믿어 주지 않거늘 어찌 상국(上國)에 통하고 천상(天象)에 통하여 마침내 하늘을 아는 경지(境地)에 이를 것인가?
이제 선생은 형제간에 우애를 다 하셨고 이어서 자손들이 가법(家法)을 계승하고 있으니 곧 그 당시 효(孝)까지 다한 것을 알겠다.일례를 들었으나 이는 다른 이야기로 즐겁자고 한 말이니 조금도 선생에게 소중함이 되지 아니 한다.
아! 하늘의 일언(一言)는 옛 성현(聖賢)의 천만 마디 말씀과 같은데 이에 돌아가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 이는 곧 글을 읽어 도(道)를 터득한 자는 진실로 알 것이니 선생으로써 말한 것이 어찌 선생 한 분만의 이야기이랴?
명(明)나라가 청나라로 바뀔 적에 강진고을 이의신(李懿信)이라는 자가 말하기를 한성(漢城)의 운(運)이 다하였으니 마땅히 교하현(交河縣)으로 서울을 옮기자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리자 온 나라가 소란하였고 부안고을 무인(武人) 김일용(金馹龍)이라는 자는 말하기를 원종(元宗) 새문동(塞門洞) 본저(本邸)에 왕기(王氣)가 서렸으니 마땅히 그 곳을 빼앗아 궁궐을 지어 기운(氣運)을 눌러야 한다고 하였기에 경복궁(景福宮)과 덕수궁(德壽宮)을 건축하는 일에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무안고을 총지사(摠持寺)의 중 성지(性智)라는 자는 인빈(仁嬪)에게 말하기를 순강원(順康園)이 풍양(豊壤) 옛 고을에 있으니 응당 왕(王)이 될 자가 나올 것이라 하여 모두의 시기심(猜忌心)을 촉발 의친(懿親)을 해롭게 하였으니 이 모두가 전라도 태생이며 선생과 가까운 이웃으로 지면(知面)도 있었고 선생의 예(藝)가 그 자들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그 자들은 주상(主上)을 미혹(迷惑)에 빠뜨려 크게는 대담하게 음모(陰謀)를 획책하고 적게는 말을 조작(造作)하여 큰 뜻을 달성하려 하였다.삼남(三南)에 곳곳마다 또한 정인홍(鄭仁弘)의 무리들이 밤낮으로 사냥개와 매를 써서 재(才)도 가히 이용하였고 술(術)도 다행히 적중(適中)하였으나 대체로 군(君)을 미혹하고 대비(大妃)를 폐(廢)하여 임해(臨海) 영창(永昌) 능창(綾昌)을 죽였으므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신해년에 죽음을 내렸다.이의신(李懿信) 또한 혈육이 한사람도 없었으니 가히 행환(幸宦)이라 이를 수 없었으나 선생만은 그렇지 아니 하니 깊이 사귄 친구는 이월사(李月沙)이고 서로 종유(從遊)한 친구는 이택당(李澤堂) 등이니 비록 난리 속에 처음으로 벼슬을 할 때 특채(特採)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양반의 자제로서 어찌 교만(驕慢)하였으리요.특히 어둠을 무릅쓰고 혼탁(混濁)한 정치에서 초연(超然)히 벗어나 국록(國祿)에 뜻을 두지 아니 하였으니 선생의 사적을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다.그렇지 아니 하였으면 선생의 이름을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한번 침묵하지 아니 하였으면 어찌 간흉의 칼날이 인조(仁祖)에게 급히 돌아갈 것을 알았으랴.계해년에 정사(靖社‥인조반정)는 선생이 또한 도와줌이니 앞서 하늘을 알았다는 설은 국가운수(國家運數) 까지를 포함함이 심히 명백할 뿐이다.저자들은 방울소리만 듣고 망령(妄靈)되이 선생을 지목(指目)하여 한갓 예(藝)에 불과하다고 폄하(貶下)하였으니 참으로 미천한 장부들이다.또한 한마디로 찬양할 것이 있으니 궁구하여 보건데 우리 성종(成宗)과 중종(中宗)께서는 멀리는 송나라 심괄(沈括)과 원나라 허형(許衡)의 고사(故事)를 이었고 가까이는 흠경각(欽敬閣) 간의대(簡儀臺)의 성법(成法)에 따라서 천문지리(天文地理)로부터 율려복서의약제학(律呂卜筮醫藥諸學)의 교수습독(敎授習讀)에 각각 골라 뽑을 것을 명령하고 그 밖에 겸교수교관을 별도로 두었으니 대전(大典)의 모든 기록은 대체로 허백 성현(虛白 成俔)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등 모든 분들의 건백(建白)에서 나왔는데 이 선(選)에 응한 자는 모두 유명한 선비들이었다.성은 유계린(城隱 柳桂隣)같은 분도 천문습독(天文習讀)이 되었는데 곧 미암(眉巖) 문절공(文節公) 희춘(希春)의 아버지요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이며 정화(鄭華)가 천문교관(天文敎官)이 되었는데 곧 호조참의(戶曹參議) 복시(復始)의 아버지요 직제학(直提學) 사(賜)의 현손(玄孫)이며 양심 조성(養心 趙晟)은 감수의상감(監修儀象監) 교율려 겸의주율(校律呂兼醫籌律) 삼학교수(三學敎授)가 되었는데 곧 용문 욱(龍門 昱)의 형(兄)이요 이퇴계(李退溪) 이자(李子)의 벗이며 옥산 이우(玉山 李瑀)가 관상감교관(觀象監敎官)이 되었는데 이율곡(李栗谷)의 아우이며 유심(柳랜)이 천문교관(天文敎官)이 되었는데 겸암(謙菴) 운용(雲龍)의 아들이요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의 종자(從子)이고 북창 정렴(北窓 鄭훼)도 또한 관상감교수(觀象監 敎授)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선생과 혹은 선배가 아니면 동시대 인물로서 구선(俱選)되어 별겸 또는 우선했던 분들이다.
그러므로 숙종조에 이르러 또 다시 명령하기를 생원(生員) 진사(進士)는 유학(幼學)은 물론이고 천문교관(天文敎官)으로 차출되면 전록통고와 대전가고를 계속하여 공부하였고 또 다시 문무관(文武官)에 차출되면 겸교수(兼敎授)로 중용하였다.내가 보고 들은 바로는 그 당시 전라도에 정도사 천득이란 분이 있었는데 광주 사람이었고 최찰방 천벽은 고부 사람인데 모두 양반으로 소문난 분들이다.일전에 내가 잘 아는 김참판문용겸에게 알아본 즉 겸교수란 것은 중세에 장악원(掌樂院)의 겸주부(兼主簿)와 같으니 이는 임금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리였다.
우리 장의동 안에 겸재 정선여(謙齋 鄭机如)라는 분도 양반으로서 주역(周易)과 중용(中庸)에 통달(通達)하고 시간만 있으면 단청(丹靑)도 하였으며 젊었을 때는 또한 교수훈본업인으로 차출되어 공로가 있었기에 후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겼으며 하양현감(河陽縣監)과 강화부(江華府) 경력을 지냈는데도 사람들은 한갓 그림이나 그리는 화공(畵工)으로만 알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영조 중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본업인(本業人) 중에서 뽑아 드디어 상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 가히 옛것을 되살릴 수 없으니 심히 애석할 뿐이다.
아! 영조 이전에 선생과 같이 처음 벼슬길에 나가는 이는 그 선발과정이 어떠했을까? 옛날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덕망도 확실한데 일종의 아첨하는 말로 의심하니 어찌 할꼬.오직 세상에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반드시 삼장(지재,학문,식견)을 두루 갖춘 사람이 아니므로 내가 이를 두려워하고 선생의 언행출처가 예(藝)에 가렸다는 것을 슬퍼하며 부득이 아울러 밝히노라.
숭정 삼년 을사 오월 일에 전행세손익찬 황윤석 엮음
折衝將軍行龍꼈衛副護軍朴公尙義墓碑銘
古者張子房撰赤霆經極道堪輿法而推原上古群聖人其裔洞玄子微者述之且闡其術朱夫子稱道其善蔡西山爲之發揮則地術固亦吾儒所宜道也吾東則無聞者而惟吾鄕朴公最善於此往往有符於赤霆及子微之遺法쏙使朱蔡見之則其必莞爾也審矣公諱尙義字宜甫初未知名當壬辰天將楊經理鎬謂接伴李公德馨曰爾國有言靑衣賊由東門入者可相見乎李公啓使出見盖公於數年前言之不見信至是人始驚服楊與語大悅曰爾是狐山之精當以術大嗚盖狐是公祖地名經理因留置軍中咨쟀行事一日軍行有鳶飛在上楊曰此何徵於師行公答曰不利不敗己而果然楊益奇之自此術益聞今簪纓家盖皆曾用其術而톺乃驗莫不稱神而月沙李相公最初知之萬曆戊戌爲司宰監主簿後帶軍職丁巳以八숄陞折衝至天啓辛酉二月初六日考終于家享年八十四葬
用公所自占府北龍門洞先塋下癸趾之原公雖以藝術聞而與其弟尙智友愛甚及公家財多推與其弟自取荒頓老羸與古人所爲者同後尙智感其義還其美田若千於公之子考諱士珣禦侮將軍祖諱守溫慶基殿參奉曾祖諱宗元贈吏曹判書돛延日吳氏學生世諶之女娶河東鄭氏生四女李翰龍金友玉李랜奇文獻其맬也而金李奇皆無后獨翰龍有后生五男允鑑宣敎郞允立允健允廷允弼允鑑初娶高興柳氏再娶黃州邊氏生六男四女行簡行敬行敏行重行文行一其男奇憬金克杓金起楊朴큉其맬也長男女柳出餘皆邊出行簡有五子鼎華泰華升華謙華晉華行敬有二子台華處華行重有八子至華益華先華時華著華亨華明華昌華先華後行敏增華行文子也嫡曾孫鼎華早夭無嗣以升華子깝爲后內外曾玄多至百數十不得盡錄公旣藝且壽多孫支法宜銘銘曰
惟玆原公自阡初欲改晩歸天地而天於術賢學公者宜所先故刻此詔萬年
年 月 日 奇挺翼 撰 號 松菴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박공 상의 묘비명
옛날 장자방(漢 高祖 때 장량)이 엮은 적정경(赤霆經)이란 책에 하늘과 땅의 원리를 말하면서 상고(上古)의 많은 성인(聖人)들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그분의 후손 동현자미라는 분이 장자방의 연구를 발전시킨 것을 송(宋)나라의 주자(朱子)께서도 (학문으로) 인정하셨고 채서산(蔡西山)이란 분이 또 다시 발전시킨 것을 보면 지리학술(地理學術)도 진실로 우리 유가(儒家)에서도 마땅히 알아야 할 분야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이 학문에 알려진 사람이 없는데 오직 우리 고을 박공께서 가장 이 학문에 정통(精通)하여 이따금 적정경(赤霆經)과 자미가 발전시킨 이론과 부합한 바 있으니 만일 주자(朱子)와 채서산(蔡西山)이 박공을 만나 보신다면 기필코 반가워하셨을 것이다.공(公)의 이름은 상의(尙義)요 자(字)는 의보(宜甫)요 호(號)는 백우당(栢友堂)인데 처음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아니 하였다.1952년 임진왜란 이후 원병(援兵)으로 온 명(明)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에게 말하기를“당신 나라에서 푸른 옷을 입은 적(賊)이 동문(東門)으로 들어오리라고 예언(豫言)한 사람이 있다던데 만나 보았는가?”하자 이공이 금시초문(今始初聞)이라고 대답한 후 수소문하여 공을 만나 보았더니 공께서 몇 년 전에 그와 같은 예언을 하셨으나 그 당시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 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공의 예언이 적중하자 탄복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호(楊鎬) 장군이 공(公)의 언론(言論)에 크게 기뻐하며 하는 말이 당신은 호산(狐山)의 정기(精氣)를 받아 출생하였기에 이처럼 학술이 대단하다하니 양호(楊鎬)가 말한 호산은 공의 조상을 모신 선영(先塋)의 이름이다.그리하여 양호 장군이 군중(軍中)에 모시고 모든 군사전략을 공(公)에게 자문하여 결정하였다.어느 날 군대가 출전하려 할 때 하늘에서 솔개가 날아간 것을 보고 양 장군이 묻기를“이것이 출전에 앞서 무슨 징조인가?”하고 묻자 공(公)이 이로울 것도 없고 불리할 것도 없을 것이라 대답한 즉 결과가 과연 그렇게 되자 공의 예지능력(豫知能力)에 대한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월사(月沙) 이정구 선생이 천거하여 만력(萬曆) 무술(1598년)에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 벼슬에 오르셨다가 그 후 군직(軍職)에서 많은 세월을 보내셨으며 팔십 노인으로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龍꼈衛 副護軍)이 되셨다.천계(天啓) 신유년(1621년) 이월 초육일에 고향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4세며 공께서 차지하신 장성읍 북쪽 용문동 선산(先山)에 계좌(癸坐)로 안장(安葬)하였다.
공(公)께서는 지리학술(地理學術)에만 능통하신 것이 아니라 형제간에 우애도 각별하셔서 아우 상지(尙智)가 분가(分家)할 때 자신이 아직 후사(後嗣)가 없음을 이유로 옥토(沃土)와 장정노복(壯丁奴僕)을 아우에게 주시고 자신은 황무지와 노복(老僕)만을 챙기시니 옛날 형제간 우애의 모범이로다.그의 아우 상지(尙智)는 감동하여 후일(後日) 조카가 태어나자 좋은 밭 천여 평을 공의 아들에게 돌려주었다.공의 아버지 이름은 사순(士珣)인데 벼슬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며 할아버지 이름은 수온(守溫)인데 벼슬은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요 증조부(曾祖父)의 이름은 종원(宗元)인데 벼슬은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시며 어머니는 연일 오(吳)씨 세심(世諶)의 딸이다.하동정씨에게 장가들어 5남 4녀를 두었으니 큰아들 윤감(允鑑)은 벼슬이 선교랑이요 다음 아들은 윤립(允立),만경현령(萬頃縣令)을 지낸 윤건(允健),윤정(允廷),윤필(允弼)이며,이한용,김우옥,이만,기문헌은 공의 사위들인데 김,이,기는 모두가 후손이 없고 한용에게만 외손이 있으며 윤감(允鑑)은 첫째 부인 고흥 유(柳)씨와 두 번째 부인 황주 변(邊)씨에게서 6남 4녀를 두셨는데 행간(行簡)과 행경(行敬),행민(行敏),행중(行重),행문(行文),행일(行一)은 그 아들이요 기경,김극표,김기양,박후는 사위들인데 큰아들과 큰딸은 유부인 소생(所生)이고 나머지는 모두 변(邊) 부인 소생이다.
행간(行簡)이 5남을 두었으니 정화(鼎華),태화(泰華),승화(升華),겸화(謙華),진화(晋華)요 행경(行敬)은 태화(台華)와 처화(處華) 두 아들을 두었으며 행중(行重)은 지화(至華),익화(益華),선화(先華),시화(時華),저화(著華),형화(亨華),명화(明華),昌華 8형제를 두었는데 선화(先華)는 행민(行敏)에게 양자(養子)로 나갔고 증화(增華)는 행문(行文)의 아들이다.큰 증손자 정화(鼎華)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승화(升華)의 아들 제(깝)로 계통을 이었으며 본손과 외손이 증손과 현손에 이르기까지 일백수십 명이 되어 모두 기록할 수 없으니 공(公)이시어 학문(學問)도 높고 수(壽)도 하셨으며 자손들도 많도다.격식에 맞추어 명(銘)을 지으니 명(銘)에 이르기를
이 묘(墓)자리는 공(公)께서 결정하셨네.처음에는 바꾸려 하였으나 만년(晩年)에는 하늘에 맡기셨네.지리와 천문에 능통하신 공(公)의 학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천문과 지리를 알아야 하기에 이 말을 비(碑)에 새겨 천만년 알리노라.
년 월 일 기정익 엮음 호 송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