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유예조공문(1801년) 인가 신묘예조공문(1831년)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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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3-25 17:47 조회31회 댓글0건본문
❍ 신유예조공문(1801년) 인가 신묘예조공문(1831년) 인가
모름지기 족보라는 것은 작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이 넘는 한 문중의 기록으로 공적문서에 가까워 특별히 한 가문의 중차대한 역사적 사실은 더욱 더 주의가 필요하고 임의로 기록되기 보다는 진실에 입각한 내용을 잘 기록하고 정확히 후손들에게 이어지도록 전하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고려말까지 원래 밀성박씨였던 우리 문중은 돈재(遯齋)공께서 태인박씨로 개칭하여 300여년을 태인박씨로 불리우다가 원래 본관인 밀성으로 복관한 시기에 대한 오해들이 있어 소견을 밝혀 둡니다. 그 중에서도 1800년대 초반 후손 박규혁(朴圭爀) 등 종원들이 해당관청인 예조에 공문을 올린 이른바 예조공문을 살펴 봅니다.
1893년 발간된 밀성박씨세보(계사보) 문헌록 192쪽(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는 분명히 신유예조공문(1801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2008년 밀성박씨 돈재공파보(1권52쪽)부터 최근 발간한 백우당공파보(1권56쪽)에도 신묘예조공문(1831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단순한 실수 일까요? 신유년(1801년)과 신묘년(1831년) 중 어떤것이 맞을까요?
알아보니 바뀐 이유가 2008년 파보 발간시에 해석하기를 신묘년(1831년)에 발간된 족보가 존재하고 후손 박규혁(朴圭爀) 어르신이 1761년생으로 그 분의 연세 70세에 공문을 작성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해서 신유예조공문(1801년)을 신묘예조공문(1831년)으로 고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심도있게 해석하고 당시 일련의 시대상황을 보면 신유예조공문(1801년)이 정당하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박규혁 어르신이 작성한 예조공문에 이 부분(再去辛酉自密城修大譜凡朴之出于密者不遺焉生等因復貫于密城固其反本事勢也)이 있습니다. 대략 내용을 풀어보면 “지난 신유년에 밀성(密城)에서 대동보(大同譜)를 수보(修譜)하면서 밀성에서 나온 모든 박씨들을 남김없이 모두 본관을 다시 밀성(密城)으로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저희들은 반드시 밀성으로 복관하여 본을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습니다.”인데 여기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去辛酉에 대한 해석입니다. 지나간 신유년(1741년과 1801년 중 하나) 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경상도 밀양과 청도지역에서 밀성박씨 대종중 행산공 후손인 박윤현 선생이 주도하여 전국 팔도 각 문중에 서신을 보내 1741년에 수보를 하면서 기존에 밀성박씨와 분관 또는 분파한 모든 밀성박씨들을 포함하여 발간한 족보를 밀성박씨 연계대보 또는 신유대보라고도 일컬어 집니다. 하여 1750년 전후 무렵부터 우리 돈재공 후손들도 원래 본관인 밀성으로 복관 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론과 조상의 뜻을 받들어 태인 본관을 유지하자는 명분론의 공존으로 이 무렵부터 밀성 본관을 다시 사용하는 증거(예시: 1773년 朴鳳章 사마방목, 1784년 朴士珣 묘지석 등)들도 나타납니다. 물론 이후에도 태인 본관을 사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박규혁(41세 무렵) 어르신이 공문을 작성한 1801년 신유년에서 지나간 신유년은 1741년이 되는 것이며 분관 또는 분파한 모든 밀성박씨를 합친 신유대보 발간년도(1741년)와 정확히 일치하기도 합니다. 1785년 황윤석 선생이 기술한 주부박공전에서도 돈재공께서 태인으로 본관을 개칭한 후 300여년이 지난 1750년 전후시기에 돈재공 후손들이 족보를 수보하면서 종의를 모아 복관한 사실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조공문은 신유년(1801년)에 작성된 것이 명확하고 매헌공께서 1687년에 태인보를 편찬하시고 신묘보(1831년)가 나올때까지 약 150여년간 우리 문중 족보 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등으로 수보를 했어도 활자화 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며 수보를 한 것으로 보여지는 몇 차례 흔적들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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